룰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죽느냐 사느냐가 걸려있어! 악을쓰며 멀어지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글레이즈를 메운다. 분명 바람처럼 사라지는 말일지라도 가벼이 여겨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민호와 뉴트에게는. 하루종일 혼자 미로를 뛰어다니던 민호의 옆에는 뉴트가 붙어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꿈나라 속, 토마스의 말은 아직까지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미미한 반항일 뿐이었다.
"왜?"
"아니 뭐. 토마스 저녀석, 러너의 임무는 잘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뉴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술병을 건네었다. 민호와 토마스는 언제나 그렇듯 새벽이 밝아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미로안을 질주하고 돌아온다. 자기가 내린 결정이지만 썩 환영받지 못하던 제안에 조금은 걱정이 되는 차였다. 낮에는 미로에서, 밤에는 구덩이감옥에서. 지칠법도 한 상황에 토마스는 언제나와 똑같이 행동했다. 신기한 녀석일세……. 한 두번 구경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관심을 끊는다. 결국 제자리에서 맴도는 토마스를 지켜보는 것은 민호와 자신, 그리고 갤리정도일까.
"달리기엔 재주있어. 그건 확실해."
호오, 그게 끝? 민호의 짧은 대답에 뉴트는 쓴웃음을 지어보인다. 이미 입에서는 달콤하다 인식되어버린 끔찍한 맛의 술이 타가고 있어 꿀같이 녹아버리는 연약한 말은 건내지 못한다. 칭찬의 말을 건내려 하지만 그것은 독약과도 같은 금단의 말이다. 되려 칭찬을 받고 싶단 것은 자신이 아닐까, 어쩌면 같이 달릴 수도 있었던 위치에 서서 편을 들어줬을텐데.
입꼬리가 올라간 뉴트의 오묘한 표정을 본 민호는 받아들었던 술병을 내려놓는다. 조금 남은 노란색의 탁한 액체가 흔들리고, 꺾여진 시야속에서 민호의 발소리도 점차 멀어진다.
"……. 아쉽지는 않아. 웩, 맛은 없고."
중얼거림과 누군가를 향해 말하는 크기의 사이. 뉴트는 고개를 저으며 술병을 들어올린다. 건배하자고. 새벽이 온다는거에.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높게 떠올라있는 오후였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다 글레이즈 근처의 사람들이 아닌 미로의 입구에 가득한 사람들이 먼저 눈에 띄인다. 애초에 이 시간까지 자신을 깨우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황급히 어느새 옮겨져 있던 자신늬 보금자리에서 일어나 미로의 입구까지 달려가자 그제서야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알비 때와 같다. 무언가 잘못된 상황이다.
"이미 돌아올 시간이 지났다고! 민호랑 토마스가 오지 않아!"
"그 둘이라면 또 하루를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럴수도…… 그래도……."
미로 안에서 불어오는 괴성같은 낮은 바람소리가 곧 문이 닫힌다는 신호를 보내는 중인 듯 했다. 이번에는 알비와 같이 부상을 입을 사람이 없으리라, 둘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 왠지 모를 위화감이 몸을 감싼다. 미로는 곧 닫힌다. 바람소리와 벽의 소리는 점점 둔탁해졌다.
"어이, 저기! 민호랑 토마스인데…… 둘다 멀쩡해!"
누군가의 소리침에 모두는 그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벽에 가려진 그들의 시야는 너무나도 한정적이었고, 그렇기에 뉴트의 다리가 움직인 걸지도 모른다. 토마스의 모습을 봤었다. 알비와 민호를 보고 입구가 닫히던 그 순간 토마스는 뛰어들어갔다.
뉴트의 걸음이 빨라진다. 조금만 더 빨리. 더 빨리, 입구가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해.
"어이 뉴트! 뭐하는 거야!"
더, 빨리. 움직이라고!
"뉴트! 저 미친새끼가!"
몸을 던져 미로안으로 들어오자 거짓말처럼 입구는 닫혀버렸다. 둔탁한 소리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미로안은 침묵에 휩싸인다.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마음이 내키는대로, 몸이 움직이는 대로 미로에 뛰어 들어온 자신의 몸이 벌벌 떨리고 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민호와는 달리 엎어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뉴트에게 달려와 그를 잡아주려하는 토마스의 표정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뉴트의 팔을 잡았을 때 느껴지는 것은 떨림이다. 분명 떨고있다. 기쁨? 두려움? 아니면 이 둘이 아닌 다른 것?
"뉴트! 일어나!"
민호의 소리침과 동시에 적막은 깨지고 곧 기괴한 울음소리가 뒤섞인 벽의 소리가 들려왔다. 크게 꺾이는 기계마찰음과 함께 미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억지로 토마스의 손에 일으켜진 뉴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낯이 익은 미로들 사이로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기억이 난다. 뉴트는 숨을 고르며 쑤셔오는 다리를 만지작거린다. 그리버는 한동안 이 구역에 오지 않는다. 저번 그리버를 죽인 구역에서 그들은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채로 밤의 미로에 남았던 것이기에, 즉 생각할 바가 있어 미로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자. 이제 말해. 무슨 생각으로 뛰어들었어? 어제부터 이상하다 싶은데."
"음. 변덕이라고 해야할까."
"웃기는 소리. 전 러너였던 네가 미로에 대해 모를리도, 두려움을 잊었을리도 없어."
전 러너라는 말에 뉴트의 표정이 굳어간다. 물론 그 사실을 몰랐던 토마스는 더욱 표정이 굳어갔지만. 민호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몸까지 숙이며 말을 꺼냈지만, 사실상 그는 화가난게 맞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뉴트를 바라보는 민호는 이내 고개를 돌린 채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뉴트는 듣지 않을테니까.
민호가 무기들을 점검하자 토마스는 문득 글레이즈에서의 뉴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잘 해서 러너의 후보라고 처음부터 말하고, 미로의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다리를 조금 전다.
"전 러너였다는거, 몰랐어."
"자랑할 일은 아니잖아? 지금 러너도 아닌데."
담담한 뉴트의 말에 토마스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괜히 기억하게 해서……. 사과할게."
"딱히, 지난일에 연연해서 좋을건 없어. 이곳에서는 현재가 가장 중요해. 죽지 않은걸로 충분하잖아?"
"그래도."
토마스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떨리던 팔을 잡고 일으켰던 것이 방금전이다. 미로에 들어온 순간 몸이 기억한 것이고, 본능적인 두려움이 덮쳐오기 시작한걸 부정할 뿐이다. 그리버의 울음소리가 크게 미로안에 울리자 문득 뉴트의 다리가 움찔거린다.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을정도로, 바로 앞에 있던 토마스가 눈치챌 정도로.
"…… 살아 나갈 수 있어. 글레이즈에만 연연해서는 안 돼."
"뜬금없이 무슨소리야? ……손 치워."
토마스는 부드럽게 뉴트의 다리를 쓸어올려본다. 떨리던 뉴트의 다리는 앙상하게도 말라있다.
"그리버는 두려운 존재인게 맞아. 하지만 이렇게 숨어있는다고 네 다리를 잃은 값을 할 수 있는건 아니잖아? 러너가 다리를 잃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안가."
웃기는 소리. 뉴트는 토마스의 손을 탁 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절뚝이는 다리지만, 뛰는 것이 느려졌을 뿐이지 다른 이상은 없다. 스스로가 납득하며 지내던 다리에 대하여 타인에 슬픔이 적셔오기 시작한다. 이곳, 미로속에 갇힌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다리를 걱정하고 있다.
"룰은 완벽하지만 완벽한 만큼 언젠가 한계가 있어. 너도 느끼지 않아? 물론 민호도 알고있다고 봐. 저기는 삶의 터전이 아닌 그곳을 위장한 지옥이야. 저기 있다간 모두 죽어."
"…… 어이 토마스. 이곳을 나갈거란 보장은 없……."
"믿어줘. 나와 함께 가자."
믿어줘, 그 한마디가 떨리던 다리를 멈추게한다. 그리버의 울음소리는 멀어지고 미로의 소리도 점차 작아진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일까, 고요하게 변해버린 미로는 흡사 정원과도 같다.
"네 다리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러너니까. 너를 잇는 러너가 되었으니 노력할거야."
손을 내민다. 벽에 기대 앉아있던 뉴트를 일으켜줄 남자가 미소를 지어보인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눈부셔. 떨림을 멈춘 팔과 다리는 더 이상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다.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은 미로도, 그리버도 아닌 자신의 마음이다. 스스로가 부상으로 러너를 그만 두었을 때 밀려온 부담감이 짓눌러온 마음.
"일어날 수 있지? 가자고. 다른 녀석들도 다시 얘기 해 봐야겠어."
토마스의 손을 잡은 뉴트는 고개를 숙인채로 일어났다. 분명,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은 땀처럼 맺어진 쓰디쓴 눈물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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