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노스케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주군인 타케루와 연인이라는 관계가 된지 어느덧 세달 하고도 하루가 지나려던 차, 그들은 연인이라기에는 예전과도 같은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스스로의 규칙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류노스케는 한숨을 내쉬면서 다음 공연에 쓰일 대본을 읽어나갔다.


 류노스케가 저택에 들리지 않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주군! 다음 공연이 준비가 많이 필요해서 당분간 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타케루는 조용히 읽던 책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향했다. 날씨는 맑음, 하지만 마음 속은 복잡함. 쿠로코들의 시중을 거절한 채 마당으로 걸어나온 타케루는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괜히 투정을 부리기에는 어른 답지 않아. 연인이 된 가신, 자신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주었던 남자는 너무나도 바른 남자이기에 더욱 참견할 수 없었다. 보고싶다, 라는 말 조차 할 수 없는 성격도 상황도 타케루는 답답했다. 지금이라면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까, 하지만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었다.


 공연이 끝난 후 류노스케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공연장을 뛰쳐나와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고싶어, 공연에 집중하는게 좋은 이유는 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발걸음은 가볍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당신을 보면 좋지만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이상적인 연인이 되지 못하는 것과 주군이라는 벽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오늘은 다를 수 있을까란 물음을 삼키며 류노스케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곧 저택 앞에 도착하고 문을 잡자, 문득 떠오르는 고백하던 날의 모습에 류노스케는 살짝 웃어버렸다. 부끄러운지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손을 잡아오던 타케루의 모습, 작은 목소리로 좋다. 라 얘기하시던 그 모습. 류노스케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주군! 그립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자 보이는 류노스케의 모습에 타케루는 저도 모르게 수행을 위해 들고 있던 목검을 내려두었다. 정말 자신도 모르게, 기다려 왔던 그가 왔기에. 먼저 손을 내밀 용기는 그 날 이후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웃어보이는 것 조차, 항상 지켜오던 자존심과 모종의 이유 때문에 하기 힘들다. 타케루는 애써 응. 이라 대답했다. 크게 웃지 말자, 오랜만이니 반가운 거다. 연인이라는 관계에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류노스케가 성큼 타케루의 앞에 다가오고 생각을 접은 것은 순간이었다.


 류노스케는 맘을 굳혔다. 뒷모습을 보는 순간, 수줍음과 충성은 접어두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주군을 대하기 위한 마음을.


 "류노스케?"
 "다녀왔습니다, 주군."

 류노스케는 성큼성큼 타케루에게 다가간 것도 잠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타케루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처음처럼,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것과는 다르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얘기하기 위해서.

 "…… 아. 어서와라."
 "네! 오늘은 뭘 할까요? 오랜만에 같이 글씨 연습이라도!"
 "음. 좋은 것 같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날씨는 맑음, 애정 정선은 이상 무.









by 레슷 2015. 10. 8. 20:06
*

 "도판트! 도판트가 방금 나왔다!"
 "허어? 어이 아키코! 무슨 헛소리야?"


 헐레벌떡 문을 박차고 들어온 아키코는 의미모를 손짓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레 들려온 도판트의 출현 소식에 평화롭게 커피를 끓이던 사무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고소한 향에 실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곧 책을 덮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필립은 숨을 몰아쉬는 아키코의 어깨를 붙잡고 흥미롭군을 연발하며 쇼타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아키쨩이 우리한테 헛소리를 할까?

 "…… 아 진짜! 자세히 말해봐!"

 쇼타로는 답답한듯 의자를 퍽 치며 테이블에 기대었다. 갑자기 왜 도판트가, 그것도 몇 년간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었기 때문에 더욱 더 의문은 커져만 갔다.

 "손톱! 손톱이 컸다구! 이따만큼 커서 도판트처럼은 안 생겼는데 도판트가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어! 흡사 자라다만 도판트?"
 "호오?"
 "어디서 봤는데? 도망은 어떻게 쳤고?"

 내 걱정이 먼저 아니냐고 바보야! 아키코는 꽥 비명을 질렀지만 친절히 사무실 앞의 사거리라고 대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찌릿하게 손 끝을 타고 오르는 사건의 느낌에 쇼타로는 필립을 바라보며 고개짓을 했다. 다녀온다, 무언의 눈빛과 함께 쇼타로는 모자를 집어들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거리를 굳이 찾아 갈 필요도 없이,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쇼타로의 길 안내를 해주었다. 엎어지듯 도망치는 사람들을 부축하고 피난시키며 도착한 그곳에는 부서진 무언가의 잔해들과 도판트로 보기에는 좀 더 단순한, 아키코의 설명처럼 손톱이 부각 된 괴물이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필립. 변신이다!"
 [기다려봐 쇼타로.]
 "뭐?"

 벨트를 들어올리던 쇼타로의 손이 멈췄다. 필립,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순간 굉음과 함께 헬기가 머리 위로 접근했고 반문을 할 새도 없이 쇼타로는 갑자기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헬기의 문이 열리고 내리는 남자 둘. 그들은 쇼타로의 손에 들린 벨트와 비슷한 모양의 것을 허리에 차고 쇼타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분하게 괴물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이곳까지 인베스가."
 "그걸 밝혀 내려고 우리 둘이 직접 이곳까지 온 거잖아? 이 마을도 꽤나 소문이 많던데 타카토라."
 "……. 음."

 인베스? 소문? 쇼타로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상황파악을 해보려 애썼지만 눈 앞의 남자들은 수수께끼같은 문답만을 던질 뿐이었다. 곧 헬기는 높은 곳으로 멀어져갔고 그와 동시에 몰아치는 바람속에 변신, 이라는 단어가 들려왔다. 그리고 처음 쇼타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메론과 레몬이었다. …… 과일이잖아?!

 "오. 흥미로워. 정말로."
 "과일, 과일이잖아. 어? 어? 필립. 내 눈이 잘못된게.아니지?"

 어느새 오토바이를 타고 옆에 도착한 필립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갑옷의 기사들과 인베스라는 존재들이라니. 필립은 신이난듯 들고 온 메모지에 현재 상황의 모든 것을 적어넣기 시작했다. 물론 쇼타로는 계속해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과일을 갑옷으로 바꾸어 변신한 남자들이 싸우기 시작한지 단 3분 후 괴물은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 한 부분, 손톱을 남기고 말이다. 부서진 손톱 조각을 들고 레몬이 되었던 남자가 변신을 풀며 메론인 남자와 무언가를 중얼 거리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언뜻 엿듣기로는 이제야…….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자세한 것은 들을 수 없었다.


 "어이 필립. 이게 무슨 상황이라고 생각하냐?"
 "레몬과 메론의 남자. 흥미로워. 키워드는…. 아까 헬기에 써져있던 유그드라실이라는 기업. 과일. 그리고 인베스……. 잠겨있잖아?"
 "잠겨있다고?"

 지구의 책장에 들어간 필립은 잠겨진 책을 꺼내보다 튕기듯 현재로 나와버려졌다. 읽을 수 없다니, 아니. 읽지 못하게 누군가 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직감적으로 필립은 깨달았다. 이것을 읽고자 하면 분명 어떠한 일이 일어날거라고.

 "돌아가자. 쇼타로."
 "뭐야. 싱겁기는. 저 사람들이 흥미롭지 않냐?"
 "딱히. 아, 저 사람들이 내 파트너보다 유능해 보여서 흥미롭기는 해."
 "뭐, 뭐!?"

 필립은 쇼타로에게 헬멧을 건네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농담으로 한 말이기도 했지만, 뒷 말은 자연스레 삼킨 채로 필립은 다시 한 번 앞 쪽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쇼타로는 헬멧을 받아 들고 툴툴거리며 얌전히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괜히 이상한 놈들만 후토에 늘고있다느니, 필립 너도 좀 더 신경을 쓰라느니. 쇼타로의 투덜거림에도 필립은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볼 수 없는 책과 새로운 적이 등장하는 미래라……. 쇼타로. 너는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아니. 네가 내 파트너라서 다행이라고."
 "…… 이자식! 새삼 그런 소리는 왜 하는거야! 이랬다 저랬다 알 수가 없네."


*



 헬헤임의 침식이 어느 특정한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곳에서 이미 붕괴하고 있는 인베스를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열매를 너무 오랜시간 먹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인베스는 가벼운 공격 한 방에 손쉽게 바스라졌다. 특이하게도 남겨진 손톱을 제외하고.

 "수고했어 타카토라. 전투 데이터와 샘플까지 완벽해."
 "그래.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지."

 타카토라는 변신을 풀며 대답했고 다시금 내려오는 헬기의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흩날렸다. 료마는 샘플로 사용할 것을 비닐에 잘 넣어 헬기에 타고 있는 연구원에게 건넸고, 문득 생각이 났다는듯 주먹을 탁치며 타카토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저쪽에 서있던 일반인 둘. 드라이버를 들고 있던데. 처음보는 형식이었어."
 "일반인이?"
 "연구해보고 싶은데. 혹시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타카토라는 헬기에 올라타고는 료마를 바라보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쁘진 않겠군. 네 연구라면 지원하지. 돌아가자."

 흐응. 료마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타카토라를 바라보다 이내 창에 비치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카토라. 네가 깨달을 쯤에는 이미 늦었을 거야. 내 연구는 이미 끝나고 있다고. 저 따위 알 수 없는 드라이버를 연구해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을 믿고 있는 너는 어쩜 이리 시시한가.

 

by 레슷 2015. 10. 8. 20:05

 나는 너를 원한다. 너의 검이 우라마사와 맞 붙을 때, 그리고 가려버린 시선이 똑바로 앞을 향해 나를 바라볼 때야 비로소 진의를 알게 될 것이다— 악몽같지만 달콤하게도 흘러 들어오는 쥬조의 속삭임은 계속해서 타케루를 괴롭혔다. 외도중과의 싸움이 끝난지도 어느덧 1년이 흘렀다. 1년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지만 짧다고도 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음의 정리라면 진작 할 수 있을 지나간 날들. 타케루는 방의 문을 살짝 열고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환영과 싸우는 것은 고독했고 무거웠다.


 "……. 나는."


 빛이 새어 들어와도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지나치게 어두워서 눈을 감은 것만 같은 느낌에 타케루는 손을 뻗어 옆에 놓아두었던 쇼도폰, 검을 쥐었다. 손길이 닿지 않아 온기를 찾아볼 수 없는 검은 싸늘하게 타케루의 손을 잡아왔다.
차가워도 네 손은 검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가? 어느새 쥬조는 타케루의 뒤에 서 있었다. 시선이 느껴져, 착각이 아니다. 쥬조는 뱀처럼 웃고 있다. 검을 잡은 손을 맞잡아 왔다. 유령처럼 주위를 떠돌지만 실제처럼 옥죄어 오는 쥬조는 타케루를 기다리고 있는듯 움직이고 움직였다.


 "나의 마지막을 끝까지 잊지 않는다. 멋진 일이군, 신켄레드."
 "웃기지마라."
 "이것은 무엇이지? 나는 무엇이지? 나는 너를 진실로 만들어 줄 유일한 존재다. 그렇지 않고 서야 너는 이미 죽어버린 자를 이리도 불러낼 리가 없지."
 "사라져. 사라지라고 했다!"


 쥬조는 다시 한 번 웃어보인다. 크게, 유쾌하게. 타케루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어느새 문은 크게 열려 빛이 한가득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쥬조는 사라졌다. 타케루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갑갑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언제나 똑같은 시작이고 똑같은 마무리였다. 수행을 하고 센서를 확인하고 가만히 글을 쓴다. 간간히 나타나는 쥬조는 매섭게 타케루를 바라보고 검을 건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신켄 레드. 너는 어째서 내 눈을 바라보지 않지?"


 타케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때처럼,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것은 혼란스럽기 때문인가?"


 타케루는 붓을 멈추었다.


 "나는 너를 보고 있다."


 타케루는 흔들렸다.


 "…… 시바 타케루. 내 이름이 무엇이지?"


 쥬조는 타케루의 앞에 서 있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쥬조는 타케루에게 되물었다. 내가 누구인가? 타케루.


 "…… 쥬조."


 타케루는 고개를 들어 쥬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텅 빈 공간. 눈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와라, 너는 결국 내게 졌고 외도의 마음을 버릴 수 없어 내게로 떨어진 것이다. 쥬조는 웃지 않았다. 꽉 다문 서로의 입술은 겹쳐지고 조용히 문이 닫혔다.

by 레슷 2015. 10. 8. 20:03
 거세게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물이 불어나고 있다는 소식이자 다른 알림이기도 한 그 소리에 타케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명소리가 귓가에 웅웅대도록 사람들의 절망이 가슴에 꽂혔으면 좋겠다. 류노스케가 외도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 후로 타케루의 목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지금과 같이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삼도의 강으로 향한다. 류노스케는 그런 타케루의 뒤를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이거. 유명한 그 분 아니신가. 시바가의 도련님?"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도중의 시비에도 불구하고 타케루는 천천히 삼도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나시렌쥬들의 공기를 찢는듯한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삼도천의 틈새에서 제거되어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타케루는 고개를 숙여 자갈 밭에 뺨을 대었다. 차가운 돌의 느낌과 간간히 쓸려오는 물이 얼굴을 적셨지만 물은 몸을 피해가려 했다. 인간이었던 외도중은 환영하지 않는다, 그렇게 물은 속삭이며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잠시동안 그렇게 얼굴을 대고 있던 타케루는 몸을 일으켰다.
by 레슷 2015. 10. 8. 20:02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제대로 뜨지 못한 눈, 하지만 감기지도 않을 그 눈은 하염없이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품에 안은 남자가 증오스럽지도 않은지 축 늘어진 팔에는 일말의 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가슴에서 땅으로 흘러내린 피는 어느새 보석처럼 굳어져 빛을 바래고 있다. 평소처럼 웃는 모습을 볼 수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도 없는 상황이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어깨를 눌러왔다.


 "마베쨩은 죽어버렸네! 너희가 늦어버려서 그래. 끝까지 마베쨩은 기다렸거든? 이야. 나에겐 희극이지만 너희에겐 비극인 이 결말!"


 시체는 말이 없다. 바스코는 크게 웃으며 품에 안고 있던 시체를 제대로 고쳐 끌어안는다. 얼굴이 앞에 보이도록 손으로 고정하며, 시체의 뺨을 쓰다듬기도 하며.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허망한 표정들이 시체의 눈에 비친다. 그들을 눈에 담아도 담아도 눈동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워 했지, 마베쨩. 불쌍하게도. 이곳에 내가 직접 칼을 꽂아 주었어. 피가 흐르는데 창백해지는 그 모습이란. 마치 피를 버리고 아름다움을 얻은 한 송이의 장미같았어."


 시체의 뺨을 만지던 손은 어느새 피범벅이 되어있는 상처부근에 내려가 있었다. 이 부분은 따뜻해 고카이저 얘들아. 왜냐고? 피가 가장 많이 흘렀던 부분이거든. 마베쨩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니까! 아직 죽은지 얼마 안 됐어. 바스코의 손은 붉어졌다. 피를 닦을 생각조차 없어보이는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마벨러스의 시체를 바닥으로 던지며 말했다.


 "하지만 난 마베쨩이 아닌 죽은 시체를 좋아하지는 않아. 그러니 돌려줄게. 현상금? 벌써 받아 챙겼지, 예전 친구의 정을 봐서 목은 따지 않았다고 해야하나. 잘 있으라고 친구들! 마베쨩이랑 좋은 시간 보내렴."


 어느새 바스코의 사략선은 근처에 도착해 있었고, 굉음과 함께 바스코는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모래바람이 일고 눈에서는 먼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줄줄 흘러내리고 너나할 것 없이 마벨러스의 시체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눈 앞의 일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혹시 모를 바스코의 함정이지는 않을지. 하지만 흘러내린 피도 멍한 눈도 사라져 버린 마벨러스의 것이 맞아서. 무너져 내린 아임과 루카를 안고 고개를 젓고 있는 가이. 그 뒤에 숨은 채 손톱을 깨무는 박사는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잖아. 아닐거야. 아니지?
 죠는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마벨러스에게 가까워 질수록 몸의 떨림은 심해졌다. 마침내 마벨러스의 앞에 도착 했을 때 결국 죠는 무릎을 꿇었다.


 "마벨러스."


 이름을 중얼거리며 얼굴에 손을 대보지만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가슴에 귀를 대보아도 심장이 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손을 잡아보아도 마벨러스는 손을 쳐내거나 잡아주지 않았다. 식어가는 몸뚱아리는 마벨러스가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마벨러스."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며 죠는 시체를 흔들었다.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대로 마벨러스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정도는 네 힘으로 감아야 하는거 아니야? 응? 마벨러스. 눈물이 떨어졌다. 숨을 쉬지 않아 오르락 내리락 거리지도 않는 배에 머리를 박고 죠는 흐느낀다. 옷을 적셔도 코트를 쥐어 뜯어도 눈물의 온기 말고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아. —마벨러스는 죽었어. 바스코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by 레슷 2015. 10. 8.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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